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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독립지사 우석 김기오 선생 2020년 신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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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언제나 새로이 해석되어야 하며, 미래는 항상 전통의 결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현대문학」 창간사(1955)에서 인용

미래엔 창업주 우석 김기오 선생은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도 계몽과 교육으로 무너진 민중의 삶을 되살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가 만든 교육과 출판문화의 기반 위에 선 우리는 나라의 미래와 다음 세대를 향한 그의 꿈을 기억합니다. 우석 김기오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기념하여 독립지사로서 그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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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이 쌓아 올린 네 개의 주춧돌

김기오 선생의 호인 우석(愚石)은 ‘어리석은 돌’이라는 뜻이지만 돌처럼 굳은 그의 신념과 조국을 향한 사랑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혼란 속에서 민중 계몽과 교육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는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우석 김기오 선생의 생애를 독립운동가, 언론인, 청년운동가, 출판인 네 가지로 나눠 조명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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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독립운동가

우석은 1919년 울산 언양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언양 3·1운동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뒤인 4월 2일 언양장터에서 일어났습니다. 언양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우석이 살던 집은 장터 가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거사에 참여했던 인원이나 장소, 스무 살이었던 그의나이와 이후 행적을 보면 우석이 3·1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우석은 언양에서 언양소년회를 조직하고 노동야학 개설, 농촌지역 강연등 지역 계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언양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우석의 활동은 양산까지 이어져 1928년 양산신간회 조직에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항일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던 청년회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1927년 이를 합쳐 하나의 단체로 만든 독립운동 단체가 바로 신간회였습니다. 신간회는 각 지역을 돌면서 강연회를 열고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일본인들의 조선 이민 반대, 타협적 자치 운동 배격, 조선인 본위 교육제도 실시 등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노동쟁의와 소작쟁의, 동맹휴학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신간회 지부의 창립을 반대하고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우석은 양산신간회 준비위원 7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양산신간회 설립에 처음부터 관여하는 한편 양산신간회가 설립된 뒤에는 조사연구부의 간사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양산신간회의 주축이 되어 꾸준히 순회강연을 하며 신교육을 보급하고 전근대적인 의식과 관습 타파에 앞장섰습니다. 아울러 국산품 애용과 근검절약, 금주, 금연 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운동을 펼쳤습니다.

1926년부터는 양산에서 ‘양산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는데 이것이 후일 신간회 활동과 맞물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됩니다.
결국 우석은 언양과 양산에서의 생활을 접고 서울로 몸을 피합니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그는 1930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동대문경찰서에 구금, 극심한 문초를 당하고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양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됩니다

두 번째, 언론인

1921년부터 우석은 언양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언양지국을 운영했습니다. 1920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된 것으로 보아 그의 언양지국 운영은 시기적으로 빠른 편입니다. 당시 신문사 지국은 신문 보급과 판매뿐만 아니라 취재 기능도 함께 담당했습니다.

우석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을 한꺼번에 맡은 것은 언양 3·1운동과 연관이 있습니다. 언양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신분 보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3·1운동 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청년들은 민족운동을 펼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당시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신분 보장을 위해 언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엔 언론을 통해 사회 지도층이 민족의식과 민주주의 사상을 설파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습니다.

우석의 이름은 1926년 울산에 기자단을 만들면서부터 언론에 정식으로 등장합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3개의 민간지 발행을 허가했는데, 이는 3·1운동으로 분노한 조선인들의 민심을파악하고 달래려는 일제의 정책적 의도였습니다. 우석은 동아일보 울산 지국장이던 박병호, 시대일보 울산 지국장 강철과 함께 기자단 창립을 논의했고 1926년 3월 7일 울산기자단 발기회를 거쳐 기자단을 창립합니다.

초기 울산기자단은 박병호, 강철, 김기오와 함께 조선일보 울산 지국장 김문성, 그리고 사상운동 기자 조현진 등 5명이 주축이 되어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지역민들의 사회 활동과 농어촌 진흥을 돕는 한편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생겨나면 제지하기로 결의하고 울산 사회운동 노선을 단일화하는 방안도 추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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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의 언론인이 된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했지만 일제에 의해 신문이 자주 정간당하는 바람에 신문사 지국들은 경영상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신분을 보장받는다 하더라도 대부분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불이익을 받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가 1926년 고향을 떠나 양산으로 이주하게 된 것도 그의 언론 활동과 청년운동이 일본 경찰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청년운동가

우석은 언양에서 언양소년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개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농촌 계몽운동과 청년운동을 벌였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청년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법보다 내부의 실력을 양성하고 난 후에 독립을 하자는 자강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언양의 지식층으로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민족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우석이 청년운동에 가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석은 언양청년회 소속으로 지방순회 강연회의 연사로 참여했습니다. 언양청년회는 강연회 외에도 연극회, 체육 활동, 야학 개설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는데 이 중 많은 행사를 그가 운영했던 동아·조선 일보 언양지국이 후원했습니다. 우석은 특히 스카우트와 노동야학에 가장 열의를 보였습니다. 미래 세대 육성과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식민지 교육과 탄압에 눌려 있던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주권 의식을 심어 주는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한편 1923년 언양소년회를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며 가극회와 웅변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언양소년회는 3년 뒤에 언양소년소녀연맹으로 개편되었는데, 개편 당시 우석이 검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청년운동은 활동지를 양산으로 옮긴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우석은 1927년 양산청년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양산에서도 농촌순회강연 연사로 활동합니다. 양산청년회에서 확대된 양산청년동맹은 양산 지역 노동자, 농민, 여성, 소년, 청년등의 사회단체를 지원하고 신간회 양산지회 설립 및 민중문고 설치 등을 수행한 단체로, 1931년 해체되기 전까지 신간회 양산지회를 이끌었습니다. 우석은 1927년 양산 지역의 소년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책임위원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청년 동맹 양산지부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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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출판인

출판인으로서 우석의 활동은 독립운동과 애국정신에 맞닿아 있습니다. 우석의 인쇄 사업은 1926년 양산인쇄소에서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사업은 상경 후 1931년 종로4가에 문을 연 고학당부터입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고초와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고학당 운영은 어려운 그의 형편을 반영하듯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1936년 고학당의 이름을 문화당으로 바꾸고 종로구 효제동으로 옮겨 다시 설립하는데, 이 문화당이 훗날 우리나라 출판문화와 교육의 바탕을 마련한 대한교과서, 현재 미래엔의 전신입니다.

교과서 발행은 조국의 교육 주권을 꿈꿔 온 그에게 숙명의 과업이었습니다. 문화당의 운영이 정상에 오르자 우석은 1948년 국내 최초로 국민주를 모집하여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창립(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1호 공모 법인)하고 문화당의 건물과 시설 일체를 양도합니다.

광복 후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하루빨리 일본의 잔재를 없애고 우리말 교재로 바꾸어야 했음에도 발행에 난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실업계 교과서는 종류가 많지만 수요가 적고 개발이 어려워 아무도 출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때 우석은 자청해 실업계 교과서 생산에 나섰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부흥을 위해선 실업 교육이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난 가서도 임시 공장을 설치하고 서울에 있던 인쇄시설을 선박으로 운송해 전시 교과서를 발행할 만큼 우석은 교과서 발행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전쟁 후 서울로 돌아온 우석은 전문 인쇄인 육성을 목적으로 1954년 대한인쇄고등기술학원을 설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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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은 생전 「조선교육」, 「아동교육」, 「소년」, 「현대문학」 네 개의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그중 「조선교육」과 「아동교육」은 각각 조선교육 연구회와 아동교육연구회에서 발간한 교육 전문지로, 미래 세대의 교육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우석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문학 잡지 「문예」가 폐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된 나라에 문학 잡지 한 권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1954년 현대문학사를 설립하고 이듬해 1월 「현대문학」을 창간했습니다. 하지만 창간 후 1955년 4월 17일(음력 3월 25일) 두 다리의 지병이 악화되어 56세의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우리나라 문학을 위해 이익을 우선하지 말고 절대 결호를 내지 마라.” 라는 그의 유지에 따라 「현대문학」은 지금까지 단 한 권의 결호 없이 발행된 우리나라 최장수 문학 월간지가 되었습니다.

우석의 삶은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고 무너진 민중의 삶을 재건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해방 후 그는 우리나라 인쇄출판업계의 기반을 조성하고 대한교과서를 창립하는 등 대한민국 교육 문화사에 큰 획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가 쌓은 주춧돌 위에서 지금의 교육 주권을 확보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록으로 보는 우석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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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는 1923년 언양소년회를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고, 이어 언양소년소녀연맹을 조직하고 청년동맹 양산지부장을 맡아 일제 강점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신간회 양산지회 설립 준비위원 7인 중의 한 명으로 활동하면서 양산 농민조합, 소작쟁의 등 반일활동에 앞장섰고, 서울로 진출하여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으로 활동 중 일경에 피체, 동대문경찰서에서 사흘 동안 엄청난 고문을 당하여 이후 반신불수의 삶을 살았다. 광복 이후 교과서 편찬을 위해 애쓰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

- 2020년 8월,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 공적개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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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이 땅의 광명을 집어삼킨 암흑의 35년간 우리는 그 얼마나 광명의 날을 고대했던가? 광명의 날만 온다면 위용당당 세계만방과 더불어 웅장히 희망의 길을 전진하리라 믿었다. 아, 그러나 기쁨의 자유 종과 더불어 해방이 오고 건국까지 이루어졌으나 우리 머리 위에는 아직도 약소민족이라는 감투가 얹혀 있지 않은가?
- 중략 -
새로운 그 어떠한 힘? 그렇다! 그것은 오로지 교육의 위대한 힘이다. 이 나라의 새로운 교육자들이 이 나라의 새로운 인재를 기른다면 공자가 나오게 하고, 성길사한(칭기즈 칸), 에디슨이 나오게 하고, 저 인류가 떠는 원자탄 이상의 것을 만들게 한다면 그 누가 감히 우리를 약소민족이라 부르랴? 약소민족이라는 욕된 감투는 스스로 꼬리를 말고 자취를 감추리라.

참된 교육! 그것만이 오로지민족의 살길이다.

「조선교육」
제2권 제6호 김기오 선생의 기고글 ‘약소민족과 교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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